sno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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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기억에 관한 잡설2013-03-02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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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아요. 대학교 다니기 이전에는 공부를 아주 잘하지 못했는데, 암기과목에서 특히 힘들었었어요. 대학에 진학하고 나니, 외워야 할 분량이 확 줄어들어서 공부를 해볼만하게 되었죠. 그리고 대학에서도 교양 과목이 더 힘들었어요. 아무래도 암기 과목이다보니, 심지어 전공은 거의 공부를 안해도 해볼만 했었는데 교양 과목은 외워야 답을 적을 수 있어서 힘들게 공부했었죠. 교직이수 안한 것도 교육학 과목들이 다 암기과목이라서 안했네요.

달리-기억의집착.jpg 

기억의 집착, 살바도르 달리


20대 초반까지는 공부하는 것 이외에 제가 살아가는 이야기는 그다지 재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별로 기억해 두려고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재밌었던 이야기들 까지 다 잊고 살아가네요. 부모님께서 가끔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의 이야기를 해 주시는데 그것도 잘 기억해 두지 못하고 있기도 해요.


이번에 울산에 다녀오면서, 진영님이랑 현민님이랑 이런저런 얘기들을 많이 나누었는데요, 그 대화 내용에서 제가 말한 것들은 대체로 제가 생각한 내용이에요. 많은 것들을 외우지 못하기 때문에, 아는 것들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생각한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딘가에서 했던 얘기를 또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얘기를 했었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술자리에서 꺼내는 이야기의 90%는 이미 들은 이야기라는 점이죠. 분명 처음 들을 때에는 재밌는 이야기인데 열번 넘게 듣다 보니까 지겹더라구요. 제가 기억력이 안좋아서 다 잊어먹고 사는데도, 이젠 다섯 단어정도 들으면 그 이야기 엔딩까지 떠올라요. 저도 그래서 같은 얘기를 또 하지 않기 위해서 누구한테 어떤 얘기를 했는지 가능하면 다 기억해 두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보다 누구한테 그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하는게 더 힘드네요.


또, 했던 이야기의 세부 사항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스토리 진행에 따라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말을 잘못하면 거짓말 하는 사람으로 보이게 되어서 문제가 있어요. 그냥 의견을 이야기 하는 경우에는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면 되는데, 경험한 일을 이야기 하는 경우에는 내용이 조금 바뀌면 전에 들었던 사람이 어떤게 틀린거냐고 물어보기도 해서 가끔 난감하죠. 들은 사람이 있으면 했던 얘기를 안하려고 하는 이유기도 해요. 


나이가 들었는지, 너무 많은 것을 잊어먹은 것은 아닌가, 잊어먹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심이 드네요. 깨달은 건 없이 마음만 늙었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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