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교양과목 기말과제였습니다. 인류학의 목적에 입각해 내 주변을 낯설게 보고 나와 타자를 상대화 해보자! 는 과제였네요. 다른 주제로 쓰다가 과제 제출 당일에 다 뒤엎고 다섯시간만에 새로 써냈던 거라 점수도 기대 안 하고 다시 보기도 부끄러워 포기하고 있었는데 예상외의 좋은 성적(!)과 좋게 봐주신 코멘트에(!) 글을 좀 더 다듬어 올려봅니다. 다듬으려고 글 보관해놨다가, 다듬을 생각하면 평생 안 올라올 거 같아서요..찌글찌글
글 좀 못 쓰면 어때요 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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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친구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던 도중, 내가 “~할 가능성은 솔직히 0에 수렴할 거 같은데.” 라고 말 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수학 교과과정에 있는 함수의 극한과 연속성에 대한 개념을 배우다보면 ‘0에 수렴한다.’는 개념은 한국의 이과 고등학생들에게 친숙할 수밖에 없다. 나도 이과를 선택했고 공부했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가능성이 거의 없다.’라는 의미로 그 말을 사용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 꽤 강하게 불편함을 표시했다. “이과생들 진짜 현학적인 척 심하다. 무슨 뜻인지 알고는 말하냐?” 연달아, “의사들도 그래. 메스라고 굳이 있어 보이는 척 하려고 한다니까. 그 급한 와중에 ‘칼!’이라고 말하면 편한데 ‘메스!’래. 처방전에도 그냥 ‘감기’, ‘빈혈’ 이런 식으로 쓰면 되는데 영어 잘 쓰지도 못 하면서 뭔지도 못 알아보게 영어로 휘갈겨 쓰고.” 라면서 짜증을 냈다. 조금 큰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과학이나 컴퓨터 관련 게시판의 글들을 보다보면, 위와 비슷한 일 겪은 이공계생이 드물지 않게 있음을 느낀다. 과학과 연관이 적은 사람들에게 주로, 영어로 된 전문단어나 축약어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부탁을 듣고 하소연하는 글들이 종종 올라온다. 과학은 기원부터가 고대 서양철학과 맞물려 발전해왔고 수많은 학자들이 영어로 논문을 쓰고 연구하며 만들어져온 학문이다. 영어에는 존재하지만 한국어에는 없는 개념을 사용할 경우,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배우거나 활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훨씬 유용하다. 전자가 분자 내에서 어느 한 부분에 치우쳐있지 않고 넓게 분포하는 것을 ‘delocalize’라고 표현한다. 이를 억지로 한국어로 바꾸면, ‘비편재화’ 라는 한자어가 된다. 오비탈의 에너지 준위가 같아진 상태를 ‘degenerate’라고 칭하고 한국어로는 ‘축퇴되었다.’ 라고 표현한다. 요즘같이 한자보다 영어가 친숙한 세대에게는 영어인 편이 의미의 유추가 훨씬 쉽다는 것을 앞선 두 예에서 알 수 있다. ‘유도 방출 에 의한 빛의 증폭‘ 이라고 하면 굉장히 어려워 보이지만, 이는 LASER, Light Amplification by the Stimulated Emission of Radiation의 약자로 우리가 생활에서 친숙하게 사용하는 물건이다. 이미 삶에 널리 퍼져서 자신도 거리낌 없이 영어로 사용하는 과학적 개념들이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이 알았더라면 저런 부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이과생으로 살면서, 어려운 개념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 해달라는 요구도 많이 받았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적 지식들은 상식이라면서 자연과학이나 공학적 지식들은 막연히 어렵고 두렵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최대한 풀어서 쉽게 설명해주려고 해도 조금 듣다가 역시 어렵네 하는가 하면, 오히려 네가 잘 모르니까 설명도 알아듣기 힘든 거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학문에는 그것이 발전해온 역사가 있고, 이전의 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이론이나 개념이 확립되기 때문에, 어떤 것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할 것들이 많다. 심지어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를 지수 함수적이라 표현할 정도로 21세기를 들어 빠르게 영역이 확장되어 기존의 전문가조차 작은 영역을 벗어나면 더 이상 전문가이기 힘들 정도임에도, 과학에 대해서만큼은 그 특수성을 잘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학교에 들어와 인문‧사회과학을 다루는 교양과목들을 들으면서, 한번은 중간고사 로 <공포의 변증법>에 대한 논문을 읽고 내면화하는 문제가 나왔다. 23페이지의 길지 않은 글을 읽으면서, 한자어로 점철된 문장과 집단적 화자,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같은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단어들, 프로테스탄트, 메타포 같은 낯선 개념들 때문에 글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문과는 너무 현학적이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와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가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들의 모습이 내게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무지와 내 기준에서 낯선 것들을 전문가의 영역으로 여기고, 문‧이과 대립에 나도 자연스럽게 동조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에서 문‧이과 간 단절이 심한 것일까. 가장 큰 원인은 고등학교 교육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학진학을 위해 학생들은 문‧이과로 나뉘어 2년 동안 학습한다. 그 기간 동안 사회과학, 인문학의 기초는 문과 학생들에게, 자연과학의 기초는 이과학생들에게만 가르쳐지며, 국어에서조차 문과 학생들에게는 고전문학과 심화된 국문법을, 이과 학생들에게는 난이도 높은 비문학 지문 독해를 주 평가요인으로 삼는다. 각 과목의 특성상 이과 학생들은 논리적으로 과정을 이해하고 주어진 사실과 조건을 파악하는 것을 배우고, 문과 학생들은 추상적 개념을 다루고 배운다. 두 집단으로 분류된 학생들에게 상대 집단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접할 기회도 잘 주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단절되고 편향적인 교육 과정은, 개인이 어떠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과정에 영향을 주어, 그가 사고와 가치관을 확장해 ‘자유 시민’으로써 소양과 인격을 갖추는 것을 방해한다. 어떤 학문에 대해 기초적인 지식을 갖추어야 그 다음을 이해하고 흥미를 느낄 가능성이 생기는데, 기본적인 것조차 가르치지 않으니 관심사나 흥미의 영역조차 제한당할 수도 있다. 주로 이공계 학생들은 고전이나 시와 같은 문학작품을 읽어도 와 닿지 않는다며 기피하는 경향이 강하다. 학생들은 교육을 통해 보편적인 가치 기준을 갖게 되므로, 교육은 개인의 사회화과정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이미 고등학생부터 대학생들 사이의 유머코드에 ‘이과 망했으면’, ‘아보가드로 수 만큼 문과 때리고 싶다’ 같이 문‧이과의 대립을 소재로 삼은 것이 만연하고, 심지어 ‘예체능은 빠집니다.’처럼 비주류가 스스로 고립시키는 양상에서,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그 교육을 받은 세대의 사회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침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학교에서도 사정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입학원서를 쓸 때부터, 학생이 문과인지 이과인지에 따라 갈 수 있는 학과가 제한된다. 학기당 수강가능 학점은 제한되어 있는데, 각 학과 학년별로 필수 수강할 과목이 정해져있고 그 중 일정 수준을 채우지 못 하면 졸업이 불가능하다. 이는 대학생들의 자율적인 학습을 방해하고, 더욱더 해당 전공 이외의 지식을 얻지 못하게 만든다. 학생들은 정해진 시간표를 제외한 시간대에 교양이나 타과 전공을 수강할 수 있다 보니, 관심사 보다는 시간과 학점을 채우는 강의를 수강한다. 대학마다 전공과목 이외에 반드시 이수해야하는 기본 소양 과목들이 있지만, 영어능력이나 자기소개서를 위한 작문, 미래에 유망한 제 2외국어 등, 취업을 잘 하기 위한 개인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개설된 과목들이 대다수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학교로 넘어오면 학문 분야의 단절은 문‧이과의 양분에서 각 학과단위로 심화된다. 학사 수준에서 단과대 사이의 학문적 교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같은 단과대 내에서의 학습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힘겨워지는 것이 현실이다. 타과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하면 안 받아주시는 교수님들도 있고, 강의 중에 이 과목을 이 과에서 들으면 여러분이 불리할 수 있으니, 재고하고 다른 과의 같은 강의를 들으라고 권유하시는 교수님들도 있다.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교가 취업을 위한 필수 관문이 되면서, 좋은 학점과 빠른 취업이 사회적으로 장려되는 대학생들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학사 커리큘럼에서 필수였던 과목이 삭제되거나 타과로 가서 들어야 하는 등 교육이 부실해지고, 재학기간이 5년을 넘으면 장학금 지원 대상에서 빠지는 등, 학생들이 학문 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폭넓고 여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사회 분위기 적으로도, 대학 내부에서도 조성되지 못 하고 있다. 학문에 대한 통섭이 강조되면서 만들어졌던 자유전공학부도 사실상 교육은 단과대 마다 개설된 과목을 학생이 알아서 찾아듣고 진로를 개척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정부에서 학과의 융합을 주장하면서, 개별 학과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합쳐져 정체성을 잃거나, 기존 학과에서 이름만 다르게 바뀐 학과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취업률에 따라 학과를 통폐합 하거나, 심지어 prime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공학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단과대 규모를 축소하는 정부 지침도 대학의 기능 상실과 학문의 발전 가능성 저해를 초래한다. 이런 대학 교육을 거치면서, 개개인은 스스로 새로운 분야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잃고, 각 분야는 그것을 배워왔던 전문가들의 것으로 고립되어, 더욱 학문간 단절이 심화되고 있다. 고등학생부터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까지가 사회를 이끌어나가고 문화를 형상하는 세대이므로, 흔히 주변에서 문‧이과 논쟁이 나오거나 학과별 소통이 불가능 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문과는 크게 인문학과 사회과학으로 이루어진다. 인문학은 인간의 근원과 사상, 문화를 탐구하고, 사회과학은 사회 현상과 인간의 행동을 연구한다. 자연과학은 관찰과 추론을 통해 존재하는 것의 법칙을 밝혀내는 학문이다. 사회의 발달정도가 낮았던 시대에는 종교가 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었고, 학문 분야의 경계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는 수많은 문화와 가치관이 혼재해 있고, 이 시대를 조화롭게 살아가고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간의 소통이 필수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의 가치와 이념이, 사회와 회사에서 요구하는 일 잘 하는 인재를 키워내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자유 시민으로써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개인을 만드는 것으로 바로서는 것이 우선이다. 또한 취업을 위한 공부가 아닌, 학문의 발전과 소통, 그리고 대중에게 지식을 보급하기 위한 대학이 만들어져야 한다. 개인 차원에서도 자신이 잘 알지 못 하는 분야에 두려움이나 거부감을 갖지 않고, 질문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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