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어렸을 적에 죽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처음으로 어떤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조금 엉뚱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이미지는 이렇다. 매우 맑고 화창한 봄날의 오후쯤 인것 같다. 동네 주택에 있는 화단에 꽃이 아주 많았고 그 속에 벌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지금은 눈앞에서 벌이 붕붕거리면 무섭지만 그 기억속의 벌은 포근했다. 그리고 벌과 많은 꽃들 사이에 죽음이라고 생각되는 한 검은 물체가 있었다. 그 검은 물체는 가운데 한 점을 중심으로 안쪽으로 회전하며 지속적으로 주변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이 낯설긴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가까이 가서 만져보려고 했지만 눈앞에서만 어른거릴 뿐 절대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나중에는 그 검은 물체가 이 세상과 다른 어떤 세상 연결하는 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죽음에 대해 기억처럼 간직하고 있는 이미지이다. 이런 감각적인 것들이 정확히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무섭거나 피해야 할 공포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나 사람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주변에서는 모든 생명체는 죽고 그것들이 죽을 때 매우 고통스럽다는 사실만을 내게 일러줄 뿐이었다. 그 때문인지 죽음에 대한 나의 감정이 호기심에서 공포나 두려움과 같은 것으로 변해갔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일 뿐이었고 나에게 다가오지 않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삼키는 생명에 반대되는 악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죽음으로써 내가 완전히 소멸된다는 사실이 무서웠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시절에 나는 죽음의 공포를 피하기 위해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굳이 나의 죽음이 아니더라도 죽음 그 자체는 언제나 우리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점차 어린이에서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면서 여러가지 형태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삶이 힘들어서 였는지 충동적으로 강에 뛰어든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대학교 후배와 폐암으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충격과 슬픔의 감정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몇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죽음은 조금 다른 형태로 다가왔다. 할머니는 노환으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매우 정정하셨다고 한다. 한 평생 자식과 후손들을 위해 희생하셨던 삶이었다. 할머니의 희생 덕분에 우리 자손들은 전보다 안정적이고 유복하게 살아왔던 것이고 이제는 덕분에 모두 각자의 삶을 잘 살고 있다. 그래서 할머니께서는 이제 할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깊은 잠을 주무시듯이 그렇게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그땐 슬프지만 슬프지 않았던것 같다.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가졌던 이미지가 다시 떠올랐다. 포근한 가을날의 꽃밭에서 그 검은 물체 앞에 서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천천히 그 검은 물체로 천천히 걸어들어 가셨다. 그 이후로 나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태도를 또 다시 바꾸게 되었다. 물론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그것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죽음이 있고 담담하고 포근하게 받아들이는 죽음도 있다. 나도 언젠가 다가올 죽음 앞에서 담담하고 편안한 얼굴로 그 검은 물체 앞에 서고 싶다. 그것이 현실의 삶을 끝내는 문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다른 삶으로 시작하는 문일 수도 있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