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둑맞은 여름이라고 하더군요. 이번 여름 비가 너무 와서 더울 새가 없었던 것 같아요. 흑. 전 여름 좋아하는데 말입니다.
언제인지 잘 기억은 안나는데, 구름낀 날 청계천을 갔다 왔었어요. 구름낀 날이 좋아서 간 건 아니라 하필 간 날이 구름낀 날이었는데 저렇게 표현하니 오해의 여지가 있군요. 역시 한글은 어렵다는...... 중의적이고 알쏭달쏭하고 긴가민가한게 많아요. 신경써서 쓰지 않으면요. 흑.
아무튼, 광교 밑에 앉아서 좀 쉬었습니다.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습하지도 않고 딱 그자리에 냉큼 드리까지고 싶다(드러눕다)라고나 할까? 표준어로는 느낌을 잘 못 살리겠군요. 한적하고 시원하고 뭐 그랬습니다. 물에서 청벙청범 뛰어 노는 아해들의 웃음소리도 맑았고요. 나도 저네 나이면 저렇게 시원하게 물에서 뛰어놀텐데...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순수는 축복인 것 같습니다. 휴...... 축복받지 못한 자의 한숨이 아해들까지 미칠까봐 크게 쉬지도 못하겠더군요. 그때 한 아해가 제 대뇌변연계의 편도핵에... 는 아니고 그냥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대 여섯살 즈음 되어보이는 아해였는데, 아해답지 않게 팔다리가 가늘고 길쭉길쭉합니다. 헐렁한 나시에 반바지를 연한 분홍계열로 맞춰 입었고, 머리는 남자아이라면 길고 여자아이라면 짧다고 할 어중간한 숏컷입니다. 아직은 청계천의 여린 물살도 버거운지 조심조심하며 물속을 걷고 있습니다. 반대편 둔치에 앉아있는 아빠를 힐끔 힐끔 바라보며 강을 반쯤 건너다가 무서운지 급히 아빠에게로 돌아가고, 못내 아쉬운지 다시 강을 건너다가 반쯤 와서 포기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아빠는 아이의 그런 고군분투에 그다지 신경을 쓰시진 않으시는군요.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며 운치를 즐기시는 듯합니다. 땅콩과 함께요. 아이는 귀엽습니다. 조막만한 얼굴에 아기자기 있는 이목구비도 또렷하고요. 그것들이 이루는 얼굴선들이 부드럽습니다. 체형도 길쭉하여, 강동원씨의 어릴때나 이나영씨의 어릴때가 연상되는군요. 그런데...... 갑자기 너무나 궁금한 것입니다. 아해가 여자 아해인지 남자 아해인지요. 허허.
한번 치솟은 궁금증은 저를, 아해와 아해의 아빠가 앉아있는 둔턱으로 이동시켜버리더군요. 대화를 엿들으면 아해 성별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하지만 강건너기가 인생의 목표가 된 아해와, 유유자적 지상낙원에 이미 도달해 계신 아빠 사이에는 대화가 이뤄지지 않더군요! 흑. 그러다가 뚫어지게 아해를 쳐다보는 저를 의식하기 시작한 아빠 덕분에 저는 고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절대 풀 수 없는 미스테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아무튼 아이는 귀엽습니다.
그러다 보니 광교에 사람이 꽤나 많아졌습니다. 처음에 앉을 때는 도합 열명도 안되었던 것 같은데...... 물안에는 한무리의 꼬마애들이 첨벙되고 있고, 상류쪽에는 고2로 추측되는 남자애들 대여섯명이 서로를 물에 빠뜨릴려 티격태격하고 있습니다. 소란스러워 졌구나... 라고 생각하는 저는, 순간 들려오는 호루라기 소리에 깜짝 놀라버렸습니다. 빨간 모자를 쓰시고 안전요원 글자를 어깨에 두른 할아버지 한분이 호루라기를 불고 계셨어요. 아해들 보고 물속은 위험하니 나오라고 합니다. 표정들이 급 서글퍼진 아해들은 느릿느릿 물가로 나옵니다. 할아버지는 상류로 이동해서 소란스러운 고2 남자애들에게도 같은 처벌을 내립니다. 귓청이 아픈 호루라기 소리와, 더 못 놀고 물가로 나와야 한다는 아쉬움을 말이죠. 그나저나 다리 밑이라 그런지 호루라기 소리가 엄청 큽니다. 소리가 울려서 그런건지, 할아버지 뱃심이 아직 뭇 청년 못지 않은지, 여하튼 정신이 번쩍 드는 소립니다. 광교 아래 둔치에는 새로운 가족들이 와서 앉고 가족의 아이는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할아버지는 다시 호루라기 소리를 선사합니다.
그러다 50대 쯤으로 보이는 중년 아저씨께서 맞서 소리를 지르십니다. "아 호루라기 좀 그만 부세요!" 옆에 앉아 계신 아저씨의 부인분은 남편을 말리는 듯 합니다만, 이미 아저씨는 열이 받을 대로 받았나 봐요. 소리 지른거에 그치지 않고 일어서서 할아버지에게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시끄럽게 호루라기 부느냐, 여기 청계천에 가족들이 뭐하러 오느냐, 발 담구고 애들은 물에 들어갈려고 오지, 수영한 것도 아니고 물속에 걸어 들어간 것도 안되느냐, 청계천은 왜 만들었냐' 하지만 할아버지도 하실 말씀은 있으시죠. '물 안에서 미끄러우니 넘어져 다칠수도 있다. 안에 유리같은게 있으면 발 다친다. 물가에 앉아 즐기고 안에는 들어가지 말라. 안전상 문제로 위에서 시키는데 어쩔수 없다.' 음. 두분 다 성질이 나셨군요. 상대방이 말하고 있는 도중에 나도 같이 말하기 전법을 두 분 다 구사하니, 두 분 마치 누가 먼저 할 말이 떨어지나 내기를 하는 듯 하군요. 광교 아래는 분위기가 가라앉습니다. 모두들 두 분만 바라보고 있어요. 물속에서 미적미적 나온 아해들도, 피끓는 고2남학생들도, 둔치에 앉아있는 가족과 연인, 친구들 모두요. 할아버지는 "왜 나한테 화를 내느냐, 위에서 시키는 거다." 라고 하셔서 아저씨는 "그러면 시장 불러와요. 시장. 당장 불러와요." 라고 대답하십니다. 아 저도 이번 기회에 시장님 얼굴 볼 수 있나요? 하하. 할아버지는 역시 연세가 있으신지라 말싸움에도 강한 것 같아요. 대뜸, 소리치는 아저씨 옆에 바짝 앉더니 아저씨 역시 앉힙니다. 그리고는 울분을 토로하기 시작하지요. 아저씨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데 할아버지께서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눌려고 하니 적잖이 당황하는 기색이였어요. 게다가 아까부터 부인분이 그만하고 가자는 뜻의 소매당기기를 계속 시현하고 계셨거던요. 새로 온 가족의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을 본 기존 아해들도 은글슬쩍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서 놀고 있습니다. 아저씨는 결심했는지 벌떡 일어납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그만하세요. 죄송해요" 라고 말씀하시고 총총 멀어지시더군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기운을 잃은 듯 합니다. 홀로 독백을 하며, 물속에 들어가 있는 아해들을 그저 바라만 볼 뿐, 소리지를 힘이 없으신 듯 합니다. 회의감을 느끼고 계실까요? 덕분에 아해들은 신나게 놀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저렇게 현 규칙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계신 아저씨는 과연 서울시 민원센터나, 서울시 홈페이지에 과연 불만을 토로하실까요. 눈앞에 보이는 할아버지께 항의하면서 시장을 불러오라는 등의 이야기는 하셨지만, 무언가 적극적으로 결과가 나올수 있을 만한 행동은 아무래도 글쎄요.
데일리안의 이의춘 편집국장이 안철수씨에 대해 쓴 기사가 있습니다. 오늘자 기사였는데 안철수씨를 NATO(not action, talk only)의 대표주자라고 지칭했지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비판을 가하기만 하지, 정작 어떤 건설적인 행동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그런 행동이 실무자의 힘을 빼긴 합니다. 그렇다고 비평이 없으면 반성이 없지요. 참 어렵습니다. 요즘엔 진정성이란게 있을까요. 이리저리 왜곡되고, 편향시키고... 애초 의도가 오해되어 전해지고.
제가 일어나서 광교를 떠나는데 할아버지는 계속 앉아 계시더군요. 오늘은 쉬실려나 봅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무래도 청사랑 소속의 자원봉사자 같은데, 참 서글픕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하셨을텐데. 음...... 문득 성별이 너무나 궁금했던 그 귀엽던 아해가 떠오릅니다. 순수와 함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