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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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버스 안에서2011-08-23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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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학교에서 늦게 나섰습니다. 일도 있었고, 마침 내린 비가 저를 더 붙잡고 있었어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정문을 나서는데 물씬 가을이 느껴집니다. 여름의 흔적은 보이지가 않는군요. 혼자 덩그라니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자니 은은하게 풀벌레 우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한없이 감성적으로 변할 수 있는 밤이네요. 아련한 옛 추억들. 오늘 같았던 옛 가을 밤들의 추억을 곱씹기 시작할때쯤 1166번 버스가 보이더군요. 훌훌 털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솔샘터널을 지나기 전, 버스 정류장에서 한 아저씨가 고성과 함께 버스를 쾅쾅 칩니다. 욕과 함께요. 멈춰 선 버스를 오르는 아저씨는 이미 술을 먹다 먹다 되려 술에 먹힌지 한참인듯 보입니다.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것은 물론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나쁜놈으로 보이나봐요. 치고 욕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버스 기사 아저씨도 괜히 건드리면 시비에 휘말릴까봐 그냥 참는 눈치네요. 제 뒤에 앉은 고등학생 다섯명도 그렇게 떠들더니 아저씨가 탄 이후로는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아저씨는 비틀대다가 겨우 자리에 앉으시고는 더 큰 소리로 욕을 하기 시작합니다. 저 욕들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요. 아무래도 오늘 서러운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 개호로새끼들.  내가 누군지 알고... 내가 54년생이야. 날 무시할 수 없어 개새끼들....  썅내 아들놈이 국가대 나와서 일하고 있는데 새끼들 감히 날 무시해. 내가 54년생이야...빨갱이 새끼들" 


발을 굴러 버스 바닥을 쾅쾅, 손바닥으로 앞좌석을 팍팍 계속 치십니다. 앞좌석 손님은 벌써 일어나 다른 자리로 옮겼지요. 아저씨의 난동이 심해져 누군가 말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말렸다간 싸움이 날 게 분명해요. 너무 흥분하셔서 주먹부터 날릴 기세입니다. 다음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는 손님들을 더 태우고 있습니다. 


"아저씨 어른 둘요." 


아주머니 두명과 아이들 두명이 탑니다. 어른 둘과 초등학생 둘이 아닌거 보니, 아직 유치원생쯤으로 생각되는군요. 남자 아이는 술취한 아저씨 앞좌석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냉큼 올라 앉습니다. 아주머니 두분과 여자 아이는 제 앞좌석에 앉았지요. 그런데 소리치는 아저씨가 신기했는지, 남자 아이는 의자에 아예 뒤로 앉더니 아저씨를 빤~히 쳐다 봅니다.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지요. 하하. 일순간 정적이 흐르더군요. 아저씨가 말을 합니다. 


"아저씨가 말이야~ 아저씨가 54년 생이야. 근데~ 아저씨가 말이야......"


아... 그 난리 치시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말꼬리는 들리지가 않습니다. 꼬마아이는 두손을 좌석 등받이에 올려놓고 아저씨를 말없이 쳐다보기만 해요. 눈망울이 똘망똘망하군요. 아저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합니다. 한숨만 쉴 뿐이에요. 뒷좌석에 앉은 고등학생들이 이야기하더군요. "야 꼬마애가 이겼다."


그 뒤로도 아저씨는 가만히 앉아서 한숨만 쉬셨어요. 꼬마 아이는 그런 아저씨도 계속해서 쳐다보더군요. 그러다가 꼬마아이가 먼저 내리고, 그 다음 정거장에선 아저씨도 내렸습니다. 그 누가 말려도 아저씨는 난동을 부렸을 텐데, 운치있는 가을밤을 지켜낸건 그 꼬마아이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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