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잠
도종환 노루잠이 들었다 깨니 저녁이었다 추녀 밑에서 흐린 물감을 풀어 천천히 하늘을 손질하며 오늘 하루도 문 닫을 채비를 하는 게 보였다 추근덕대며 나를 따라다니던 비루한 욕망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몸도 자주 피곤하였다 그 비루함으로 어떤 때는 발걸음에 힘이 들어가고 옆 의자에 앉은 이가 예뻐 보이기도 한다는, 이 부인할 수 없는 목소리를 어떤 날은 내치고 어떤 날은 은근히 기다리며 구두 끝에 묻은 흙을 털기도 하다가 어느새 동무가 되었다 쪽잠이 든 사이 낮술에 취한 듯한 시간이 가고 그도 다른 일거리를 찾아 슬그머니 나를 빠져나가고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다 저녁 무렵 혼자되니 이것도 참 좋다 가만히 있는 허술한 몸을 바람이 발길로 툭툭 건드려 보다가 간다 - <유심> 11,12월호
안농하세요. 현민입니다. 위의 시를 읽고 든 단상을 조금 끄적여볼까합니다.
제게는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정말 잘 어울려요. 언제부터, 어느 연유로 이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주변의 평가, 사람, 성공, 허영심, 질투, 과시, 열등감, 명예, 물욕, 권위의식
등등..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담백하고도 깔끔한 인간이
되고 싶다고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루한 욕심이라 여기는 것들을 모두 다 내려놓고 살자니, 저 스스로가 너무나 재미없는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왜 고기도
적당히 비계가 섞여 있어야 맛도 좋고, 씹히는 즐거움도 있지 않나요??!
비유가 좀 이상한가?! 크흐흐~ 어쨌든 사람이 살면서 어느
정도 욕이 필요하다 친다면 지금의 저는 얼마나 적정한 비율로,
어떻게, 제 삶을 채워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완전한 무욕의 경지의 근처에 가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이어지는 의문이겠지만요, 무욕, 무아의 상태에서는 어떤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낙법(Learning to fall)을 배우면 우리가 평소에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우리의 성취, 계획,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 자신- 을 놓아버리기만 하면 결국 가장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삶을 놓아버리면 좀더 충실하게 우리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필립 시먼스,『소멸의 아름다움』)
여러 집착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가장 끝에 있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을 것이고, 결과적으론 현재를 충실하게 살 수 있는 자유를 맛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미완성인 저도 진정한 완성의 길에 다다를 수 있을지.. 잠깐 멍을 때려봅니다. 흐아하~ 앞으로 졸업하고 뭐해서 먹고 사나 걱정을 시작해야 할 지경인데, 망할. 무슨 얼어 죽을 성인군자 흉내를 내고 있는 건가 싶네요. 물론 이것이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자각이 있기까지는, 그 자체가 제게 필요하다면 문제될 것은 아니겠죠, 뭐. 
Swansea, Wales,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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